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태평양 전쟁/배경 (문단 편집) == 태평양 전쟁 이전의 일본 상황 == [[러일전쟁]] 직후의 [[일본]]은 워낙 승리가 화려했던 탓에 외부적으로 열강의 대열에 합류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애초에 중공업 생산 기반이 변변찮고, 농업 기반의 국가였던 당시의 일본은 스스로 해결 불가능한 수준의 막대한 전비와 후유증을 떠 안게 되었다. 몇 년치 예산에 해당하는 전비를 쏟아부었는데, 그 돈의 대부분은 영국과 미국에서 차관(빚) 형식으로 들어왔다. 무엇보다 러일전쟁의 결과가 일본의 승리이기는 한데, 그렇다고 일본이 완전히 이긴 것도 아니어서 장기적으로 가면 불리하다는 애매한 상태로 종결되었다. 러일전쟁의 종전을 논의하던 포츠머스 회담에서 러시아측 대표인 [[비테]]는 일본 대표단에게 "'''우리는 어려운 국내 사정[* 새해 벽두에 발발한 [[피의 일요일 사건(러시아)|피의 일요일 사건]]으로 러시아 전역에서 차르 퇴위를 외치는 노동자 파업과 농민반란이 속출하면서 무정부 상태에 접어들고 있었고, [[포템킨 반란]]으로 군까지 흔들리는 상황이 되자 차르정권은 일본과의 전쟁을 하루 빨리 마무리 짓고, 국내 수습에 집중할려고 했다.] 때문에 전쟁을 끝내는 것이지, 결코 전쟁에서 패배한 것이 아니다!"'''라고 윽박지르며 배상금을 못주겠다고 버텼으며, 일본 대표단도 러시아가 배상금을 지불할 능력이 없다는 현실을 파악하고 있었고, 서구열강들에게 "돈이나 밝히는 신생 국가"로 여겨져서는 안 된다는 위신상의 문제가 겹쳐 배상금을 요구하지 못했다. 그러나 [[청일전쟁]]으로 '전쟁을 이기면 배상금으로 소비된것보다 더 많은 돈을 벌어서 경제에 도움이 된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던 국민들은 배신감을 느꼈으며, 이는 삼국간섭때와 같은 서구 열강에 대한 반발과 [[히비야 방화 사건]]과 같은 과격한 행동들을 불러왔다. 아무튼 러시아는 배짱을 튕기며 단 한푼의 배상금도 지불하지 않을 수 있었고 일본 입장에서는 조선에 대한 지배권, 남만주의 이권을 확보했다. 더 자세한 내용은 [[러일전쟁]] 항목을 참고하도록 하자. 하지만 러일전쟁을 끝낸 포츠머스 회담도 미국의 영향력이 뒷받침된 것이었고, 일본 내에서도 "우리가 러시아를 상대로 더 많은 전리품을 얻어낼 수 있었는데, 미국이 압력을 넣어서 차지하지 못했다."라는 반미감정이 싹 텄으며, 그로 인해 일본도 1907년부터 제국국방방침을 정해서 미국을 2순위 적국으로 삼고서 육해군이 매년 연도작전계획을 작성하는 등 미국과의 전쟁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https://www.ddanzi.com/ddanziNews/31002682|링크]] 그러니까 일본이 1941년에 일으킨 [[진주만 공습]]으로 대표되는 미국과 일본의 전쟁은 이미 34년 전부터 그 싹이 트고 있었던 셈. 그 와중에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고 연합군에 참전은 했지만 유럽 반대편에 있던 국가라서 [[독일령 뉴기니]]의 일부[* [[남양군도]]], [[독일령 칭다오]]를 점령한 것 말고는 군수공장 역할만 충실히 수행했다.[* 이 외에 칭다오를 탈출한 독일 동양함대를 추적하기도 하고 지중해에 소함대를 파견하기도 했다. 영국이 막 취역한 순양전함 [[공고]]를 영국해군에 파견해 달라는 요청도 했지만 이것은 거부. ~~실현되었다면 유틀란트 해전은 독일함대 vs. 영-일 연합함대 사이에 벌어졌을 수도 있었다~~] 덕분에 1차대전 종전이후 승전국으로서 세력 확장은 물론이고 전후에는 호황세에 접어들면서 [[다이쇼 데모크라시]]가 시작되는 등 안정세를 되찾는 듯 보였고, 1921년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에 참여하는 등 열강의 지위를 인정받았다. 하지만 잠깐 반짝이던 일본 경제는 그 전후호황이 투기광풍으로 변질되어 급기야 버블붕괴로 막을 내렸으며, [[관동 대지진]]의 뒤치다꺼리를 하다가 [[https://ja.wikipedia.org/wiki/昭和金融恐慌|쇼와 금융공황]]으로 은행업계가 초토화되는 등 잠시도 쉴 새 없이 악재만 이어졌다.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금해금|금본위 복귀]]를 내세운 [[https://ja.wikipedia.org/wiki/立憲民政党|입헌민정당]]이 집권하여 체질개혁을 단행코자 막대한 출혈을 감수하며 금본위제 복귀를 밀어붙였으나, 때마침 불어닥친 [[세계 대공황]]으로 인해 미국과 영국이 제각기 금태환 중단을 선언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 위정자들은 계속 고집을 부려 금본위제 존속을 천명했고 엔화는 환율 투기꾼들의 먹잇감으로 전락하였다. 정치적으로는 정부와 군부, 국민간의 갈등이 심화되고 있었다. 일본은 1928년부터 보통선거를 시행하는 등 제한선거를 폐지하고 국민의 의견을 수렴하는 흐름으로 가고 있었다. 국제경제적 위기나 관동 대지진과 같은 사건으로 민생이 크게 개선되지 못했으며, 삼국간섭때부터 지속된 해외 열강에 대한 반감 등으로 정부의 권위가 하락하고 반대급부로 군부에 대한 지지가 나날이 커지고 있었다.[* 일본군은 1차대전의 전훈을 분석하여 식량비축을 위해 농민을 보조하고 의무교육비를 지원하는 등 민생친화적인 정책을 주장했고 이것이 국민의 지지를 얻는 큰 요인으로 작용했다.] 급기야 [[관동군]]이 내각의 통제를 정면으로 무시하고 침략전쟁을 벌인 [[만주사변]]이 일어나게 되었으나, 사건을 되돌리려고 노력했던 정부의 의지와는 달리 당시 도쿄대학 대학생의 88%가 이를 정당하다고 생각했을 정도로 정부와 국민의 의견대립이 큰 상황이었다. 더군다나 만주사변이 대단히 성공적으로 끝나면서 만주 정복이 순식간에 완수된 까닭에 [[군대]]의 정치적 입김과 파워는 더더욱 막강해져 결국 [[5.15 사건]]([[이누카이 쓰요시]] 암살)으로 헌정이 붕괴되고 [[2.26 사건]]에서 황도파 쿠데타를 진압했던 통제파가 정권을 잡으면서 완벽한 [[군국주의]] [[천황제 파시즘|파시즘]] 국가로 변모하게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